인기 있는 드라마의 단골소재 중 하나는 모진 고난을 겪은 여자 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서 신분상승과 더불어 경제적인 안정과 행복까지 이루어내는 고진감래의 스토리이다. 모진 고난은 대부분 집안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구박받으면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여성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1945년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작과 더불어 교육과정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다. 우선 서구화된 고등교육기관이 개설되기 시작하였고, 이화전문학교도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승격됨과 동시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따로 행림원을 두고 의약학부를 운영하면서 현대적이고 전문적인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1]. 이와 같은 학제 개편은 국가적으로도 새로운 인재를 육성하고 발굴하는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
농경문화에서는 노동력이 경제력이다. 따라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더 큰 남성 노동력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전 세계적으로 남아가 우선시되는 현상이 있었던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도 전통적으로 남존여비, 부부유별 등의 유교적 사상이 정치사회적 전반에 밑바탕이 되었으며, 이로 인한 남아선호사상은 숱한 이야깃거리들로 남아있다. 남아가 우선되는 문화는 조선시대에는 매우 기본적인 사회구조로 여러 종류의 기회의 불균형을 낳았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교육의 기회는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는 고급의 자격이었다. 그 관습은 근대와 현대를 거쳐서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남자형제에 비해 많은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이야기들은 1970년대 이전 출생자들에게서 흔하게 들어볼 수 있다.
더군다나 의학교육은 교육비가 많이 필요한 분야이다. 교육의 기회를 부여 받는데 경제적 측면만 고려될 것은 아니나 학비의 압박이 기회의 불균형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할을 했으리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훌쩍 상회한 지금도 의사가 되기까지의 비용은 다른 단과대학에 비해 높은 편이다. 교육의 문이 여성에게 좁던 시절에 비용이 높은 의학교육을 여성에게 부여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귀중한 기회였음이 틀림없다. 극단적으로 다른 의과대학의 경우 1980년대 이전 입학생의 경우 여학생의 비율은 매우 낮았다는 것을 보면 여성에게만 의학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는 여자 의과대학의 설립은 큰 발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화여자대학교는 1886년 미국의 여자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사립여성고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으로부터 시작된다[2]. ‘이화’라는 교명은 1887년 고종황제로부터 하사 받았는데 이는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화학당의 공식적인 시작과 함께 스크랜튼 여사는 1887년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여성을 위한 진료소를 개설하고 이에 대해 역시 고종황제에게서 ‘보구여관’이라는 칭호를 하사 받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료기관이 탄생하게 되었다[2,3]. 감리교에서 파견된 여의사 메타 하워드가 정식으로 진료를 시작하면서 남녀구별의 문화적 배경으로 남자의사가 진료하는 병원에서 진료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여성 환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역시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사건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만큼 보구여관의 설립과 존재는 우리나라 의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보구여관은 한옥을 개조하여 사용하였으며(Fig. 1), 진료실, 대기실, 약국, 창고가 있었고, 큰 전실을 수술실로 사용하여 서구식 병원의 형태를 갖춘 구조였다. 병실은 총 5개로 한 방에 12평 남짓이었고, 3채의 건물에 나뉘어져 있었다. 온돌형식의 병실로 따뜻한 방바닥에 요를 깔고 누웠으며, 30-35명의 부녀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4]. 현대적인 침상구조는 아니었으나 온돌방과 요를 쉽게 소독할 수 있어 청결하게 유지되었다. 보구여관은 성황리에 운영되어 1899년경에는 1일 평균 10명이 입원하여 평균 33일 정도 치료를 받는 등 한국여성들이 근대의료의 혜택을 받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4].
보구여관은 지속적으로 번창하여 1893년 동대문 분원으로 볼드윈 진료소를 열었으며(Fig. 2), 1912년 동대문 분원자리에 새 병원이 준공되면서 볼드윈 진료소는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으로 개칭되었고(Fig. 3), 정동 보구여관은 이에 통합되면서 그 역사적 소임을 다하였다[1]. 메타 하워드를 시작으로 6명의 여의사가 시기별로 보구여관에서 진료를 하였는데,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박에스더)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4]. 김점동(박에스더)은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으로 보구여관에서 통역 등의 업무를 하던 중 구순구개열 수술을 보조하면서 의사로서의 꿈을 품게 되었고, 로제타 셔우드 홀(메타 하위드 후임으로 보구여관에서 진료한 여성 의료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보구여관 및 평양의 광혜여원 등에서 열정적인 의술을 펼쳤으며,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로 한국의료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5].
보구여관은 이화학당과 자매기관 또는 부속기관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학당 학생들의 건강 문제를 보구여관이 담당하였고, 보구여관에서도 학생들이 통역에서 약제일까지 많은 일을 하였다[2]. 1890년 보구여관에 부임한 로제타 셔우드 홀은 여성 의학교육에도 강한 열의를 보여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의료 강습을 시작하였다[3]. 이화학당 학생들에게 생리학을 강의하였고, 5명 학생을 선발하여 의료훈련반(Medical Training Class)을 조직하여 생리학과 약리학 등을 가르치는 동시에 약을 제조하고 환자를 돌보는 실습수업을 하며 이들은 의료진으로 훈련시켰으며, 이는 한국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의학교육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1,4]. 보구여관의 정식적인 의료교육은 간호교육부터 시작되었다(Fig. 4). 보구여관의 간호원이던 마가렛 J. 에드먼즈가 설립과정을 담당하여 1903년 6년의 교육과정을 가지는 한국 최초의 간호학교 “간호원양성소”가 설립되었고, 1906년 3년간의 특별과정을 이수한 첫 졸업생 2명을 배출하였다[4]. 비록 정규 의학과는 개설되지 않았으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의학교육은 1917년 로제타 셔우드 홀 박사에 의해 시작된 여성의학연구소(Woman’s Medical Institute)에서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1931년부터는 일주일에 평균 4-6시간씩 강의가 진행되었다[1]. 보구여관과 이화학당을 기반으로 1945년 해방 후 이화전문학교가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되면서 그 즉시 의과대학이 설치될 수 있었으며, 이로서 많은 여성들이 정규의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화의료원은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에서 이어진 동대문 부인병원을 첫 부속병원으로 시작하여 신촌 부근의 주민보건을 위해 신촌병원을 운영한 바 있으며(1954-1961) (Fig. 5), 1993년에 제 2 부속병원으로 현 목동병원을 개원하였다[1]. 2008년 동대문병원이 목동병원에 통합된 후 새로운 제 2 부속병원으로 서울 마곡지구에 새 병원 건립을 2018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다. 또한 여성 진료 및 연구의 특성을 살린 이대여성암병원을 2009년 개원하여 여성전문병원의 전통을 계승해 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의료선교사의 희생과 헌신으로 태동되었던 뿌리를 잊지 않고, 1989년 이화의료봉사단(Ewha medical care, EMC)을 조직하여 네팔, 캄보디아,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등에 20년이 넘도록 꾸준한 의료봉사를 하며 우리가 받았던 도움을 어려운 이웃에게 다시 돌려주고 있다.
보구여관은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으로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배출의 토대가 되었으며,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의학교육이 시작되고, 한국 최초의 간호원양성소가 설립되었던 기관으로 근대 여성의료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보구여관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화여자대학교는 해방 후 일찍이 의과대학을 개설함으로써 여성 의학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개교 이래 현재에 이르는 70년동안 수많은 우수한 여성 의학자와 여의사를 배출해 내고 있다.
우주시대를 앞두고 분자와 나노의 개념이 도입되는 시대에 여성만을 교육하는 의학교육기관의 의의를 새로이 되새김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아직도 성별의 차이로 인해 편견과 차별을 겪는 일들은 줄어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눈에 덜 뜨일 뿐이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성별을 굴레로 교육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었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너무나 귀중한 기회를 제공한 역사적인 교육기관이며 이는 70년의 긴 역사 속에서 꾸준하고 묵묵하게 여성 의학자들을 배출하며 무시할 수 없는 은은하고 뚜렷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이제부터는 더욱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목표를 앞에 두고 세계를 무대로 한걸음 성큼 내디딜 바로 그런 시기이다. 보구여관으로부터 시작된 이화의 미래는 여전히 기대할 만하다.